애도의 과정

2024-11-01

누군가에겐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라며.

죽음의 과정

아빠의 암 진단을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안돼, 아빠는 진짜 안돼. 불공평해, 너무 잔인해.

두 달의 투병기간 동안 기적을 바랄 틈도 없이 아빠의 상태는 악화됐다. 세상이 아빠의 운명을 정해 버리고 통보했다.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아빠는 마음이 선한 사람이다. 내가 마음이 예쁜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빠 때문이다. 또한 평생 남을 돌보며 살아왔다.

어릴땐 싱글맘인 할머니(아빠 엄마) 대신 고모(아빠 동생)를 돌보았다. 커서는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인물이 되었다. 서른, 지금 내 나이에 첫 딸인 나를 가졌다. 딸 둘, 형편에 과분한 교육시키려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며 참 치열하게 살았다.

아빠를 쏙 빼닮은 큰 딸은 도통 한국에 돌아오질 않았다. 대학 보내놓고 내 삶 좀 살아볼까 했더니 할머니(아빠의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고 큰 후유증에 8년간 호스피스 생활을 했다. 아빠는 일주일에 한 두번 병원에서 잠을 지새며 할머니를 돌보았다.

할머니를 보내고, 이제 큰 딸도 작은 딸도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겠다, 이제 내 삶을 살아보자 한 터였다.

시골에 땅 사고 건축사무소 연락해 올해 말 쯔음 집 지어, 지혜야 내년부턴 한국 오면 공기 좋고 경치 예쁜 시골에서 지내자 했다. 평생 모은 책 가지고 북카페 차려 손님이 있건, 없건, 강아지 당나귀 키우며 지내자 했다. 난 좋다고, 얼른 집 지으라고, 내 방은 창문이 컸으면 좋겠다 했다.

아, 아빠는 너무 착한 사람이라, 평상 남을 돌보며 살아와서, 이번 생 업보를 이미 다 값아서 일찍 쉬러 가는 걸까,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두려웠다. 아빠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했다. [link to post]

죽음의 과학적 논리를 이해했고, 삶의 서술적 논리가 없음을 받아드렸다.

착하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못됐다고 더 아프게 죽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어나는 가장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이야.

죽음 (2024.10.04)

아빠가 떠났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처음 가보는 장례식장의 상주가 되었다. 별로 울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 와 줄 때면, 껴안고 잠깐 울었다. 손님이 뜸할 때, 방에 들어가 잠시 훌쩍었다. 그 외에는 울지 않았다.

빛이 꺼진 채 수의를 입은 아빠를 봤을 때에도, 아빠가 꽃으로 장식 된 관에 놓여질 때에도 울지 않았다. 병원에서보다 좋아 보이네, 하며 웃어 보았다. 사진도 찍었다. 그 사진을 다시 열어보진 못했다.

화장터에서 아빠는 가루가 되었다. 옆 방에선 아들을 떠나보낸 아줌마가 통곡했다. 우리 아들이 왜 이렇게 됐어..! 우리 아들 가지 마. 반대쪽 방에는 나이 극진해 보이는 할머니 사진이 놓여 있었다. 가족은 차분하고 슬픈 미소를 띄며 앉아 있었다.

세상엔 슬픔이 많다.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거대한 슬픔도 있고, 자연스러운 슬픔도 있다.

의지 (2024.10)

마음 굳게 먹자, 정신 똑바로 차리자. 나 자신에게 되새겼다. 아빠는 떠났고, 우린 살아간다. 아빠에게 약속한 대로 난 정말 잘 살거야. 재밌고 멋지게 살거야. 그러니까 힘!!!

난 아빠를 그리워 하는 것에 이미 익숙해. 이젠 그저 평생 그리워 하는 거야. 그게 다야.

물리학에선 말한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이고 시간은 '환상'일 수도 있다고. 나의 시공간 어딘가에 아빠는, 소중한 것들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토록 소중한 것들이 있었고, 가장 사랑하는 아빠가 있단 것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는 영원하고 불변하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다. 죽음에 대한 책을 잔뜩 주문해 읽었다. 또, 블로그 포스트를 올렸다. 죽음을 숨기고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난 일임을 받아드리고 마주하는 행동이었다.

간혹 오는 '잘 지내?' 'Hope you're doing well :)', 혹은 'I hope your situation's better' 와 같은 무해한 말이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사실 아빠 떠났어'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도록 선포하고 싶던 것도 있다. 비록 이 곳을 찾아주는 소수의 자만이 읽겠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틈새 (2024.11)

아빠가 떠난 직후가 가장 힘들고, 가장 그립고, 서서히 나아질거라 생각했다. 점점 덜 슬프고 덜 보고 싶어질 줄 알았다. 난 충분히 강하다 생각했다.

전혀 아니었다. 마음에 틈이 조금씩 생기면 그 틈새로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움이 나를 뒤덮었다. 가끔은 온몸이 마비가 된 듯 슬펐다.

아빠 방에는 아직 아빠 냄새가 배여있다.

아빠 책꽂이에 내가 하이라이터 쳐가며 열심히 공부했던 대학교 심리학 교과서가 있었다. 영어 못하는 아빠는 이걸 봤던걸까.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빠 친구들은 아빠가 나를 엄청 좋아했고 내 자랑을 엄청 했다고 한다. 아빠에게 들은적은 없지만 나도 안다. 나도 친구들에게 아빠 자랑 엄청 하고 다녔거든.

일 때문에 일주일간 베를린을 갔다왔다. 비행기 대기하며 '도착하면,,문자해,,,' 라는 톡이 안와서, 도착해 '나 잘 도착해쓰~!' 라는 톡을 보낼 사람이 없어, 도착하고 한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독일,,도착함,,,?' '날씨는어때,,' 라는 톡이 안와서 주저앉아 엉엉 울고만 싶었다.

아빠 실비보험 계약해지 안내가 내 카카오톡으로 올 때. 아빠 핸드폰에 건축박람회 안내 문자가 올때. 아빠의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문뜩 '아빠 눈은 슬픈데 입은 웃고있네' 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누군가가 나에게 이 말을 했던 사실이 떠오를 때. 마음을 와르르 무너지게 만든 아빠의 뱉지 못한 말들과 눈빛이 나를 쫒아다닐 때.


앞으로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또 있을텐데, 벌써 너무 두렵다.

분노

어쩌면 나에겐 오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분노 단계가 왔다.

아빠는 왜..

서서히 조금씩

슬픔에 허우적 대다 보면 필연적으로 이런 순간이 온다. 가슴 속에서 '잘 살아야지! 재밌게 살자!'라는 기운(?)이 끓어오른다. 힘이 난다. 다시 웃는다. 타고난 나의 천성인가 보다.

위로의 말

다양한 위로의 말을 들었다.

힘들어도 괜찮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내가 여기 있어.

친구들을 하나둘 씩 만난다. 단체로도 만난다. 애써 elephant in the room 을 외면하고 밝은 얘기만 하려 한다. 이해는 하는데 숨막힌다. 나는 아빠가 너무 좋구 너무 보고싶고 그치만 건강하게 애도하고 보내주려 하는데, 그래서 이거에 대해 다 털어놓고 얘기해도 되는데. 애써 회피하는 모습에, 아빠 얘기를 조금만 꺼내도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올라가는 그들의 텐션에, 숨이 막힌다.

추모의 단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모델로 잘 알려진 애도의 단계는 커다란 상실 후 사람들이 겪는 감정을 설명한다.

이 모델에 따르면, 처음에는 부정이 방어 기제로 작용한다. 이어서 분노 단계에서 자신, 타인, 세상을 향해 좌절감을 표출하게 된다. 불공평해, 세상은 너무해. 타협 단계에서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모델로 잘 알려진 애도의 단계는 중대한 상실 후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적 반응을 설명합니다. 이 단계들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을 포함합니다.

처음에는 부정이 방어 기제로 작용하여 개인이 상실의 충격을 처리할 수 있게 합니다. 이어서 분노 단계가 오는데, 이때 개인은 자신, 타인, 심지어 고인을 향해 좌절감을 표출할 수 있습니다. 타협 단계에서는 죄책감과 함께 협상을 통해 통제력을 되찾거나 상실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상실의 현실이 와닿으면서 개인은 깊은 슬픔과 일상 활동으로부터의 철수로 특징지어지는 우울 단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용 단계에서 개인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이는 감정적 안정과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단계들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에 따라 이 단계들을 다른 순서로 경험하거나 애도 과정 전반에 걸쳐 특정 단계를 여러 번 재방문할 수 있습니다. 애도는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며,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헤쳐 나갑니다.

그렇다면 저 단계를 다 겪어야 한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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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정보를 간단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애도 5단계 모델은 1969년 그녀의 저서 "죽음과 임종에 관하여"에서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이 모델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포함하며, 처음에는 임종 환자들의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모델은 다양한 형태의 상실에 대한 반응을 이해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고, 현재도 여전히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단계들이 반드시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개인에 따라 경험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데이비드 케슬러에 의해 "의미 찾기"라는 6번째 단계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모델은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모든 사람의 애도 과정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일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애도 이해는 이 모델을 기반으로 하되 더욱 유연하고 개인화된 접근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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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969년에 만들어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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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운 것은 누군가의 죽음은 단지 사랑하는 누군가를 평생 보지 못한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NOTES

충분한 애도 과정